세종대왕 때인 1434년,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자격루는
기존의 물시계들과 달리
자동 시보장치로 작동하는 구조로 유명하다.
자격루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물의 유속과 양을 조절하는 수량제어 부분과
인형의 움직임으로 시각을 알리는 자동시보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 두 부분을 연결하는 장치,
즉 동력전달과 시각조절을 담당하는
두뇌 역할에 해당하는 시스템이
'주전(籌箭)'이다.
자격루가 다른 물시계와 차별화되는 이유인
이 '주전'은 그동안 유물이 현전하지 않았고
도면 없이 조선왕조실록에 글로만 묘사된 상태.
왼쪽에는 동판(銅板)을 설치하여,
길이는 살대[箭]에 준하고, 넓이는 2촌인데,
판면(板面)에는 구멍 열 둘을 뚫어서
구리로 만든 작은 구슬을 받도록 하되,
구슬의 크기는 탄알[彈丸]만 하며,
12구멍에 모두 기계가 있어서 여닫을 수 있도록 하여,
12시간을 주장하게 하고,
오른쪽에도 동판을 설치하되, 길이는 살대에 준하고,
나비는 2촌 5푼인데, 판면에는 25개의 구멍을 뚫어,
또한 작은 구리 구슬을 왼쪽과 같이 받게 한다.
판(板)은 12살대에 준하여 모두 12판인데,
절기에 따라 갈아 쓰며, 경과 점을 주장하게 한다.
-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7월 1일 병자 4번째기사
후대 사람들은 이걸 읽으며
1) 주전이 길고 얇은 구리판이라는 점,
2) 판마다 구멍들이 뚫려있다는 점,
3) 그 구멍마다 구리구슬을 받도록 했다는 점,
4) 경점법에 따라 절기마다 다른 밤의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구멍의 간격이 다른 주전들이 11개가 있었다는 점
까지는 파악했지만
당시의 실물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 경점법(更點法) :
밤의 길이를 5등분해 경(更)으로 나누고,
각 경마다 다시 5등분한 점(點)으로 나누어
밤 시각을 25등분하는 시각체계.
여름은 밤이 짧고 겨울은 밤이 길기에
절기마다 밤의 시간 길이가 달라지는 부정시법에 해당한다.)
과거 국립고궁박물관 지하에 복원된
자격루의 실물 크기 모형 역시
핵심 장치인 주전을
앞서 언급한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해서 복원한 바 있었다.
사실 도면이 없는 상황에서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이지만...
2021년 작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선 전기의 금속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화제를 모았는데
여기에서 발굴된 유물 중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주전의 실물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자격루 복원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다.
위 짤이 바로 주전을 구성하는
각각의 유물들이다.
주전의 동판.
주전에서 구슬을 방출하는 기구.
특히 이번 발굴에서 주목할 점은
1전(一箭)이라는 명문이 적힌 동판이다.
경점법에서 필요한 주전 11개가
언제 어느 때 사용되는지를 정리한
'누주통의(漏籌通義)'라는 책의 내용을 비교한 결과
인사동에서 출토된 주전 동판 중
1전 명문이 있는 동판 외에도
3전, 6전에 해당하는 동판이 있음을 밝혀냈다.
발굴팀은 세종실록의 기록과 더불어
이번에 함께 출토된 다른 유물들의 제작시기,
장영실이 만들었던 자동물시계
보루각 자격루와 흠경각 옥루의 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번에 세상에 나온 주전이
1536년 중종 때 만든
창경궁 보루각 자격루의
주전인 것으로 추정했다.
1434년(세종 16) 작동에 들어간 자격루는
1455년(단종 3) 사용을 중지했다가
1469년(예종 1) 다시 가동했고,
1505년(연산군 11) 경복궁에 있던 자격루를
창경궁으로 옮겨 새 보루각에 설치했으며
제작한지 100년 가까이 되어
시각이 잘 맞지 않자
1536년(중종 31) 자격루를 다시 만든 바,
이 글의 맨 위에 있는 짤이
바로 이때 만든 자격루의 유물 일부이다.
국립중앙과학관에서는
한국과학기술사관 리모델링 작업 중인데,
국립고궁박물관 지하에 있는
자격루 실물 크기 모형을 여기로 옮긴 뒤
이번에 발견된 주전을 적용해
(국립고궁박물관에 복원된 자격루에 들어간 주전은
실제로 발굴된 주전과 비교했을 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자격루의 전시를 추진하고 있다.